한 주간 어떠셨어요? 정태희입니다.
컨설팅을 하다 보니 매년 리듬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해져 있고, 주제들도 익숙합니다. 바로 '리더 평가와 보상', '피드백 교육'입니다. 10월 말, 평가철이 오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의뢰입니다. 그리고 교육 중 쉬는 시간이 되면, 참가자 리더들로부터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날아옵니다.
"대표님, 저성과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하신 리더들께 제가 드리는 첫 대답은 늘 같습니다.
"저성과 '자'가 아니라, 저성과 '이슈'가 있는 사람이라고 우선 불러 보시겠어요?" 라고요. 말장난처럼 들리실 수도 있지만, 제 경험상 이 한 글자 차이가 평가 면담의 결과를 가른다고 믿거든요. 저의 경우, 수없이 '저성과자'라고 생각하고 이별했던 정말 많은 동료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기억이 많습니다.
저는 상대에 대한 존중도, 이슈의 명확한 본질도 모른 채 "같이 일할 사람, 아닌 사람"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행위 중심의 접근만 했습니다. 어린 리더 시절의 저는 스스로 일잘러여서, 일이 서툴거나 굼뜬 사람에게는 바로 저성과자 프레임을 씌워 버렸거든요. 그 행동은 상처받은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당시 최악의 리더 평판으로 제게 돌아왔어요.
억울함이라는 건 무시가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되더라고요. "조직에 충실하며 주어진 일만 했을 뿐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머릿속에 불편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면, 그 이름 뒤에 어떤 말이 붙어 있나요? 저성과 '자'인가요, 저성과 '이슈'인가요?
'자' 한 글자에는 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저성과자'라고 부르는 순간, 문제가 그 사람의 몸에 붙어 버립니다. 마치 바코드를 몸에 박듯이, 해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꼬리표가 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저성과 이슈'라고 부르면 문제가 사람과 떨어져 책상 위에 올라옵니다. 당사자와 인격적으로 같이 들여다볼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제가 상대를 '저성과자'라고 부르는 순간, 저는 해결을 멈추고 판단을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현장에서 만난 저성과 이슈를 뜯어 보면, 뿌리는 대개 네 갈래였습니다.
첫째는 문제나 과업을 잘못 짚은 경우입니다. 맡은 일이 그 사람의 역할과 맞지 않거나 목표 자체가 흐릿한데, 리더도 구성원도 꾸역꾸역 바쁘다 보니 서로 방치됩니다. 이 경우는 구성원과 리더 모두의 잘못이 명백합니다.
둘째는 역량의 간극입니다. 아직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한 바구니에 담기는 일이 많습니다.
셋째는 역량 인식과 태도입니다. 리더가 기대하는 것과 구성원이 이해한 것이 달라도 소통 없이 방치되면, 주파수가 안 맞으니 소리가 나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마지막 네번째가 가장 억울한 경우입니다. 바로, 일은 나름 잘했는데 직무나 사업부가 통째로 사라지는 상황, 소위 '소똥을 밟는 케이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저성과자라는 이름표를 붙이나요? 사실 이 꼬리표는 어느 누구에게도 붙일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 없고, 저성과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풀어야 할 '이슈'이고, 이슈마다 뿌리가 다르다는 거죠. 리더가 뿌리를 모르고 내린 처방은 진단이 아니라 판단과 추정이더라고요. 그리고 그 추정과 확신의 비용은 늘 구성원이 내게 됩니다.
제 KPI는 '성공적으로 마친 감축 인원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쓸까 말까 오래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써야 이 글이 정직해질 것 같습니다. 제가 아시아 퍼시픽 지역을 맡고 있던 시절, 비용 압박으로 조직 전체를 매트릭스 조직으로 개편해야 했습니다. 저는 400명의 임원과 관리 인원 감축 명단을 받았고, 늘 친근했던 임원 동료 친구들에게 패키지를 제시하며 떠나 달라는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때 보스가 제시한 저의 KPI는 두 가지였습니다.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마친 나라별 감축 인원수, 그리고 전체 조직별 비용 감소치 목표.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KPI 장표에 없던 것이 있습니다. 떠나시는 분들의 가족, 개인 사정, 그리고 존중과 공정한 과정에 대한 '경험' 관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아무도 제게 그걸 상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너를 믿어"라고 했고, 바깥 인사 선배들의 조언은 한결같이 "짧고 굵게 처리하세요. 기간이 길고 말이 많아질수록 말려요." 그 모든 조언에는 받는 사람의 시선이 빠져 있었습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면 이런 장면이 보입니다. 통보하는 쪽에게는 일정표의 한 칸이지만, 받는 쪽에게는 인생에서 되돌릴 수 없는 큰 트라우마 모멘트라는 것을요. 저는 그 무게를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일수록 납득이 되는 마음의 동의를 얻기위해 상당한 노력이 요구 됩니다. 동의를 얻는다는 것은 승낙을 받아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가 준비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제가 가진 KPI 표에는 없지만 명심했어야 하는 '마음의 KPI'가 있었습니다. 최대한의 존중을 받았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와 팀의 사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는가. 하필 왜 우리 조직이고, 왜 나인가 하는 분노가 사그라들 만한 대화가 이루어 졌는가. 그것을 납득, 타당, 공정하게 신부의 마음처럼 정성껏 준비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걸 뒤늦게 배웠습니다. '짧고 굵게'라는 단어는 하는 사람의 편의입니다. 반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 짧은 시간에 굵은 트라우마가 되어, 오랫동안 자신감을 잃고 괴로워할 수 있었으니까요.
통보하던 사람이 통보받을 수도 있는 자리
저는 임원으로 17년을 살았습니다. 처음 3년 임원 시절의 종신형 계약을 빼면 해마다 갱신하거나 1년, 2년, 3년 단위로 계약을 이어 가는 자리였습니다. "잘하면 잘릴 걱정을 왜 하냐"는 농담도 주변에서 하지요. 그런데 목 뒤에 칼을 든 사람이 서 있다고 느끼면, 위로도 아래로도 바른 판단, 바른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바른 말이 이별 통보로 돌아오는 일도 많이 보았고요. 그러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업 결과가 뾰족해도, 그 결과를 떠받치는 구성원과 동료, 상사, 이해관계자와의 관계 관리 균형이 무너지면 결과도 오래 못 간다는 사실이죠.
구성원들은 너무 힘들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신의 리더를 향한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웃음은 가짜가 되고, 일도 재미없으니 가짜 노동이 됩니다. 숫자는 멀쩡한데 조직은 속에서 엄청난 빌런을 키우고 있는 셈이지요. 분기마다 오는 헤드헌터의 평판 조회 요청을 보더라도, 결국 일보다 그들과 일했던 기억이 그 리더의 발목을 잡더라는 거죠.
한 문장이 사람을 유능하게도, 무능하게도 만듭니다
지난 8월 컬럼(제목: 편향된 총애의 덫)에서 저는 리더의 말 한마디가 구성원을 유능하게도, 무능하게도 만든다고 썼습니다. 오늘은 그 한마디가 평가 면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써 보려 합니다. 하버드대의 로젠탈과 제이콥슨은 교사에게 '곧 성적이 오를 학생'이라며 무작위로 뽑은 명단을 건넸는데, 정말 그 아이들의 성적이 더 올랐다는 연구를 내놓았습니다. 조직으로 넘어와서도 리더의 기대가 구성원의 성과에 영향을 준다는 메타분석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강연에서 가끔 '필패 신드롬'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리더가 한 번 "저 친구는 안 되겠어"라고 마음먹으면, 그때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실수뿐이라는 것이고, 더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가고, 결국 서로의 말투는 조금씩 차가워집니다. 구성원은 그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챕니다. 그렇게 대해진 사람은 정말로 위축되고, 리더의 눈에는 "역시 안 되네"가 확인됩니다. 예언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평가 면담에서 처음 듣는 지적은 피드백이 아니라 기습 공격이 됩니다. 기습을 당한 사람은 내용이 아니라 그 순간의 리더를 기억하게 되죠.
'저성과 이슈 관리'는 사람 관리가 아니라 이슈 관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더들께 강연에서 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저성과 이슈 관리는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고, 바로 이슈를 관리하는 일입니다. 일하는 방식과 소통하는 방식, 서로를 이해하는 정도와 일을 대하는 태도를 구성원과 함께 들여다보면 "네가 문제야", "아니, 당신이 문제예요"라고 다투는 대신 문제의 뿌리를 같이 보게 됩니다. 싸움의 상대가 사람에서 이슈에 대한 진짜 문제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면 리더들이 제게 하소연하는 말은 거의 같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보낼 수도 없잖아요. 말을 꺼냈다가 관계만 나빠질 것 같고요." 한편 구성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구구절절 옳은 말씀인데, 구석으로 몰리는 느낌이에요." 같은 대화를 두고 양쪽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누구나 지적받는 일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저의 경우 아빠의 잔소리가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밥상머리에서 신나게 밥을 먹으려 하면 아빠는 늘 "국은 오른쪽!" 하셨거든요. 저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도, 저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왜 국은 오른쪽이어야 했을까요.
만약 아빠가 한 문장이라도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면, 저는 지금 돌아가셨지만 아빠를 '밥상머리 교육을 참 잘해 주신 멋진 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원하시는 것은 있는데 설명이 없었기에,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빠였지만 적어도 아빠랑 밥을 먹을 때 국이 나오는 것이 참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해야 해요?"라고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 예의 없는 아이가 될 거라고, 어린 저는 혼자 추정했거든요. 아빠와의 좋은 추억도 많지만 '국은 오른쪽'이던 그 겸상만큼은, 지금도 행복한 기억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저성과 이슈가 있는 구성원의 자리에 놓아 보겠습니다. 리더가 "이번 평가는 기대에 못 미쳤어요"라고 말하면, 구성원에게 들리는 것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구나", 또는 "내가 죽어라 했는데 인정해 주지 않으시네"입니다. 정작 짚어야 하는 것은 "어떤 기대였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인데 말입니다.
리더에게는 이유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리고 구성원은 억울한 데다가 그 이유를 알 방법도 없는데, 대개 "왜요?"라고 묻지 못합니다. 제가 아빠께 묻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이 질문이 무례해 보일 거라고 추정하기 때문입니다. 리더의 '국은 오른쪽'은 구성원에게 이유 없는 요구입니다.
이유는 말해야 하는 존재합니다.
특히 친하고 믿는 사람일수록 이유를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 안 해도 알겠지"의 함정이 깊거든요.
최근 워크숍에서 한 실장님이 "내 조직의 한 팀장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고생했어'래요. 그럼 뭘 어쩌라는 건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도 '국은 오른쪽'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느꼈습니다. "고생했어"에는 무엇이 좋았고 다음에 무엇이 필요한지가 없으니까요. 그 팀장은 습관적인 위로가 아니라, "그래서 내가 잘한 건가, 아닌가"를 알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한 면담들
2013년 가을, 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실패 면담은 유난히도 제가 지쳐 있던 날이었습니다. 해외 출장도 많았고 거대 프로젝트가 소낙비처럼 밀려왔고, 제가 가장 사랑하던 엄마도 암으로 투병하시던 시기라 몸도 마음도 바닥인 상태였습니다.
본사는 6개월 시한 안에 조직 내 6억 원의 비용 감소를 요청했고, 저는 다른 사업부 헤드 역할까지 떠안으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쫓기듯 해당 구성원을 만나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말투는 날카로웠을 테고, 듣는 대신 결론부터 내밀었을 테고, 웃었는데 웃는 게 아니고 경직된 얼굴에 상대는 오히려 불쾌한 방어막을 올렸을 것입니다. 결국 당사자도 끝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저는 저대로 주어진 과제를 이루려 몰아치기를 강행하여 리더로서 인생 최악의 면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구성원은 어디선가 저를, 저도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듯 서로의 기억 속에 찝찝함만 남아 있겠지요. 다만 돌아보면 이 또한 제 그릇이 얼마나 작았는지, 충분한 준비와 관계 관리 없이 서프라이즈 폭탄을 투척한 리더인 제 탓임을 이제는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실패는 피드백을 방치했을 때였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 말이 쌓이는 동안, 리더인 저는 저대로, 구성원은 구성원대로 각자의 마음속에 너무 큰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주 앉았을 때는 이미 둘 사이에 조율할 구멍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말해 봤자 바뀌지 않아", "말했다가 관계만 깨지겠지."
'알아서 느끼겠지' 하는 마음은 전략이 아닙니다.
그저 저의 회피이자 방치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구성원을 만나기 전에 먼저 제 그릇을 철저히 점검합니다. 오늘 나는 공정한 리더인가, 들을 수 있는 상태인가. 이 사람을 존중할 마음이 남아 있는가. 답을 주려고 가는가, 듣고 이해하려고 가는가. 그래서 저의 그릇이 안 되는 날은 과감히 면담을 미룹니다. 그리고 면담에 들어가면 이렇게 합니다. 종이 한 장에 관찰한 행동과 결과만 적어 가고("태도가 안 좋다"가 아니라 "지난달 보고서 두 건이 마감을 넘겼다"처럼요), "이 일에서 가장 막히는 게 뭐예요?" 하고 묻고 입을 닫고 끝까지 듣습니다.
그 다음 1~2주 등 가급적 짧은 기간 안에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약속 하나를 정하고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납니다. 작은 약속은 부담이 작아 시도하기 쉽고, 지켜 낸 경험이 쌓이면 구성원도 다음 약속을 지킬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리더의 말도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가령 "이번 평가는 기대에 못 미쳤어요"라고 말하면 마음이 닫히더라고요. 대신 "지난달 보고서 두 건이 마감을 넘겼는데, 저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열리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한마디를 붙입니다. "내가 혹시 빼먹었거나 도와줄 일이 있을까요?" 물어도 안전한 자리를 만드는 것까지가 리더의 일이니까요.
그래도 안 되는 경우,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대의 태도가 뿌리인 경우에는 저도 개인적으로 처방이 곤란합니다. 기대를 분명히 전하고 충분히 듣고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저는 조용한 이별을 준비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조용히'는 몰래가 아니라, 존중을 지키며 소란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내 팀 안에서 조직을 갉아먹는 뱀파이어까지 애써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붙들고 있는 동안 남은 구성원들의 에너지가 새어 나가니까요.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도 리더의 몫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리더가 되려다, 가장 성실한 구성원에게 가장 나쁜 리더가 될 수 있더라고요. 다만 이별에 이르는 과정이 존중과 공정함으로 놓여 있었는지에 따라, 떠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도 남은 사람이 가져가는 것도 달라집니다. 같은 이별이라도 어떤 사람은 억울함을 안고 나가고, 어떤 사람은 아쉬움을 안고 나갑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봅니다.
이별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저는 세 가지를 마음에 둡니다. 놀라게 하지 않기, 상대의 사정을 묻고 듣기, 결정 뒤에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 가족과 개인 사정은 서식에는 없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는 있으니까요.
'의지가 없어 보이는' 사람
"개선 의지가 없어 보여요." 많은 리더들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문장에는 '보인다'가 들어 있습니다. 리더의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제 경우에도 그런 구성원이 있었습니다. 늘 뚱한 리액션과 쳐진 어깨, 미소 없는 영혼이 나간 표정, 솔직히 제 눈에는 거슬렸고, 기도 빨리는 데다가 저 스스로 그녀가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환절기만 되면 비염과 피부병으로 말할 수 없이 최악의 컨디션을 맞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구성원도 묻고 대화하니 가정사와 성향을 알게 되어 풀렸습니다. 알려 하지 않고 "도대체 직장생활을 왜 저렇게 하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나 홀로 해석의 줄줄이 사탕만 만들었지 진솔한 대화마저 없었으니, 하마터면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오만하고 경솔한 리더가 될 뻔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피드백을 한 것이 언제인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정답은 없지만 최소한 리더가 먼저 주파수를 맞춰보려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말이 멈춘다면, 답은 이미 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가가 끝나면 통보가 시작됩니다
평가철이라는 말이 가볍지 않은 이유를 보여 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20일 Reuter 통신이 보도한 퀄컴은 연간 직원 평가가 끝난 뒤인 11월부터 '성과 중심 감축'을 시작한다고 알렸습니다. 기대에 계속 못 미쳐 온 직원이 대상이라고 합니다. 평가 한 줄이 누군가의 내년과 연말을 좌우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평가 면담이 그 한 줄을 처음 듣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은 오른쪽, 그리고 모리 교수의 화요일
이번 주 꼭 강조하고 싶은 마무리는 '저성과자 이슈'는 사람을 판정하고, '저성과 이슈'는 문제를 함께 푼다는 사실입니다. 평가 면담은 그 둘 사이에서 리더의 품격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리더의 언어가 문화라고 믿습니다. 최근 제가 참여하는 북클럽에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다시 읽었습니다.
루게릭병으로 삶의 끝에 선 모리 교수와 제자 미치가 화요일마다 마주 앉는 이야기이지요. 모리 교수가 죽음 앞에서 앨봄에게 남긴 가르침 중 "죽음은 삶을 끝낼 뿐, 관계를 끝내지는 못한다"는 말이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말을 읽으며 저는 두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한 사람은 이유를 끝내 듣지 못한 채 떠나보낸 아빠입니다. 너무나 존경한 아빠이지만, 뭣 때문에 밥상머리에서 그리 강요하셨을까 하는 의문은 이별 뒤에도 그렇게 이어지더라고요.
또 한 사람은 2013년 가을의 그 구성원입니다. 그녀와 저는 서로를 탐탁지 않아 하는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 관계 역시 끝난 것이 아니라 풀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는 셈이겠지요. 이별은 그 사람의 자리를 끝낼 뿐, 관계까지 끝내지는 못합니다. 400명에게 이별을 전하던 시절의 저는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구성원을 만나기 전에 아빠와의 식탁을 떠올립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마음도 오래도록 아쉬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요.
제목에 '미움받을 용기'를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미움받을 용기가 모진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니라, 미루지 않고 이유와 함께 구체적으로 말하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미움받을까 봐 말하지 못한 시간이 길수록, 결국 더 큰 오해나 이별을 만들더라고요. 중요한 하반기 일각일각을 리박싱(re-BOXing) 해보셔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정태희 드림
jadechung@rebox.asia
SNS. jadechung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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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 Business Today, 퀄컴 성과 중심 감축 보도, 2026.10.20 —
- 정태희 컬럼 #7 「비난이 선물이 된 피드백 - 편향된 총애의 덫」,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