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태희입니다.
이번 주는 지난주 TV조선 인재혁신포럼 패널로 참여했던 경험과, 최근 읽은 아티클 한 편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써봅니다. 몇몇 지인이 자꾸 글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쓰게 됩니다.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라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한다고 생각하니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운동처럼 글쓰기를 습관화하는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요즘 종종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이메일로 쏟아지는 글과 브리핑, 잘 정리된 보고서나 메일을 받아서 읽는데, 다 읽고 나면 손에 남는 게 없습니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갖춰져 있고, 심지어 그럴듯한 비즈니스 용어까지 적재적소에 박혀 있는데, 정작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지?"라는 질문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입에 달고 사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을 빌리자면, 딱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입니다. 저의 편집증적인 디테일한 성격이 문제인가 가끔 생각도 하는데, 이런 단어가 세상에 등장하다니 조금 반갑더라고요.
업이 업인지라 저는 매주 글로벌 기사를 자동으로 모아 꾸준히 챙겨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워크슬롭'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요즘 AI 작업물들에 유독 지쳐 있었습니다. AI 특유의 흐릿한 글자 스타일도, 검정과 파랑이 섞인 그 일률적인 초기 디자인, 딱 봐도 알아보는 이모티콘과 구도, 그리고 근거 없이 단호하기만 한 말투. AI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딱 봐도 'AI가 만든 티가 나는' 슬라이드와 문서를 여기저기 돌리고, 그 문서들이 떠돌아다니는 걸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은근 화가 나고 쓸데없이 상대에 대한 편견이 생기고 더 피로해졌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요즘 들어 손끝이 지면에 닿는 걸 느끼며 종이를 넘겨 책도 더 많이 읽고, 진정성 있는 사람을 만나는 그 향기가 너무 좋아지며, 찐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아 서너 시간씩 걸리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정리하며 연습합니다. 자꾸 사고를 정리해보는 거죠.
슬롭이라는 말의 원래 뜻
앞에 언급된 워크슬롭의 '슬롭(slop)'이라는 단어는 원래 영어로 양동이에 흥건히 담긴 걸쭉한 음식물 찌꺼기, 흔히 돼지에게 주는 남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최근 몇 년 사이 소셜미디어를 뒤덮은 저품질 AI 이미지와 텍스트를 가리키는 'AI 슬롭'이라는 은어로 먼저 쓰이기 시작했고, 그게 다시 일터로 옮겨오면서 '워크슬롭'이 된 것입니다. 잔반은 배는 채워도 영양가는 없습니다. 워크슬롭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채우지만 남는 건 없다는 것이죠.
워크슬롭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나왔다
이 현상에 이제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접한 자료는 지난해 9월 스탠퍼드 소셜미디어랩과 AI 코칭 플랫폼 베터업(BetterUp)이 공동 연구를 통해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처음 소개한 내용이었습니다. 생성형 AI가 별다른 고민 없이 대량으로 찍어낸, 겉보기엔 완성도 높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는 결과물 — 메일, 보고서, 기획서, 슬라이드까지 — 을 가리킵니다.
이 연구가 미국 정규직 사무직 1,1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난 한 달 사이 이런 워크슬롭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41%였고, 이걸 받은 뒤 문제를 파악하고 수정하는 데 평균 두 시간 가까이(1시간 56분)를 썼다고 답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녹음해서 전사록을 AI에게 맡기면 근사하게 정리를 해주긴 하는데, 대화 맥락 속 중요 키워드나 기억해야 할 메모가 빠지고, 전사록만 믿으니까 회의록을 고치는 시간이 원래 수기로 타이핑하던 것보다 오히려 더 걸리더라고요. 사실에 기반하기보다 AI가 만들어낸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문장의 틀 안에서 제가 그걸 고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작업하다가 '앗, 나 뭐 하고 있지' 싶을 만큼 생각이나 일하는 방식에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키워드 메모를 따로 해두고,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사록을 AI에게 정리하도록 하고 최종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AI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저만의 방법을 하나씩 쌓아가는 중인 거죠. 아침에 이메일을 열면 쏟아지는 뉴스레터들도 테러처럼 느껴질 정도라, 읽다 지쳐서 결국 수신거부하는 것도 일이 됩니다.
이 아티클에서 또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응답자 급여 기준으로 환산하면 워크슬롭 한 건당 월 186달러의 숨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비용 절감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목입니다. 더 공감되었던 것은 워크슬롭을 받은 사람의 53%는 "짜증이 났다"고 했고(저는 인성 문제인지 좀 많이 화가 나더라고요), 42%는 그걸 보낸 동료를 "이전보다 덜 신뢰하게 됐다"고 답했습니다. 셋 중 한 명은 "그 사람과 다시 일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주 전 야심에 찬 젊은 창업가 대표님이 2년간 설계해온 인사 플랫폼의, 최근 드디어 출시를 앞둔 데모를 보여주었는데, 딱 봐도 AI를 몇 주 밤새 돌린 느낌이라 UI도, 디자인도 아쉬워서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선한 후배이니 다시 만날 기회가 되면 꼭 도와주어야겠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통계에는 안 잡히는 저의 부끄러운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한 동료가 정말 고민하며 만든, 아직 완결되지 않은 중간 결과물을 보여줬는데, 너무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저도 모르게 "이거 AI로 돌린 거 아니에요?"라고 말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동료는 그때만 해도 AI를 거의 쓰지 않았고, 사실은 정말 진심으로 고민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는데 말이죠. 너무 잘하면 AI 덕분이라 여겨져 정당한 인정을 못 받고, 반대로 못하면 AI를 사용해도 안 쓴 척하게 되는 — 일종의 'AI 섀도우 현상'이 생겨버린 셈입니다. 결국 제 말 한마디의 충격에 그 동료가 상처를 받았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AI 때문에 저 역시 순간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리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제일 많이 AI를 활용해 앱도 만들고, 다양한 기능을 사용해 보며, 무엇을 덜 하고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직관을 키우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올해 6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린 후속 기고는 더 흥미롭습니다. 옥스퍼드대 매티어스 홀벡 교수와 뱁슨칼리지 토마스 대븐포트 교수는, 워크슬롭의 진짜 위험은 개인의 실수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게 쌓이고 쌓이면서 조직 전체의 지식 기반 자체가 서서히 부식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니, 지난해 7월 MIT 미디어랩 조사에서는 생성형 AI에 투자한 조직의 95%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AI 도입 속도는 두 배로 빨라졌는데, 정작 남는 결과물은 이렇게 천편일률적이고 더 가벼워지고 있었던 겁니다.
속도는 빨라졌는데, 왜 더 무거워졌을까
AI 덕분에 작성 속도는 분명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몇 초, 몇 분 만에 나온 수십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사람이 다시 검토하고 환각과 비논리, 맥락의 끊김을 걸러내는 데는 오히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업무 완성 속도'라는 말 대신 '업무 완결 속도'라는 말을 씁니다. 작성만 빨리 끝났다고 일이 끝난 게 아닙니다. 검토하고, 고치고, 신뢰를 확인하는 데까지 걸리는 전체 시간이 진짜 속도입니다. 워크슬롭은 이 완결 속도를 오히려 늦춥니다.
여기서 제가 목표관리와 성과관리 강연 때마다 늘 강조하던 두 단어가 떠올랐는데요. 바로 Output(과업 결과)과 Outcome(의미 있는 성과)입니다. 그리고 완성과 완결이라는 단어의 차이입니다. AI는 무엇이든 완성을 통한 결과물(Output)을 만들어냅니다. AI에게 정말 인정하고 싶은 부분은, 표 그리기·구조화하기·방대한 데이터 분석하기·오타 잡아내기 같은 문서 정리 작업이 거의 전문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의 정확성이나 맥락 연결만큼은 그렇지 않았고, 사람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하더라고요. 특히 창작이나, 정보를 맥락으로 엮어내는 일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한 문서 하나를 딸깍, 뚝딱 '완성'해내는 데는 몇 초, 몇 분도 안 걸립니다. 하지만 그 산출물이 실제 문제를 해결했는지, 조직의 꼬인 문제를 풀어 진짜 가치를 남겼는지, 서사와 맥락이 담긴 인간 경험이 들어가 있는지 — 즉 의미 있는 성과(Outcome)를 '완결'짓는 일은 여전히, 그리고 오직 사람의 몫입니다. 완성은 빨라졌는데 완결은 여전히 사람의 속도를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AI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 사람의 역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I를 무조건 많이 시도하고 써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녀석의 역할은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명확하니까요. 다만 산출물을 의미 있는 성과로 빠르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인간의 스킬이고 변하지 않는 역할이니, 이 인간의 몫도 그만큼 명확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책도 많이 읽고, 생각을 생각해내는 깊고 조용한 사색의 시간도 필요하며, AI의 산출물이 진짜 성과로 이어지도록 맥락을 채우고 책임지는 것은 더욱더 우리 몫임을 확신합니다.
어릴 적 인턴 시절, 제가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사무실 복사기 성능이 형편없었습니다. 나름 가장 비싼 일본산 복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요즘과 달리 그 당시는 표나 글씨가 흐릿하게 나오거나 아예 잘려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인턴 시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화받고 복사하는 것뿐이었으니, 복사라도 잘하자 하는 마음으로 색과 굵기가 맞는 볼펜을 따로 사서 흐리게 나온 부분을 하나하나 손으로 덧대어 진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저의 복사물을 받는 사람이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휴가를 갔는데, 제 미국인 상사는 다른 인턴에게 "제이드(제 영어 이름)에게 복사기 어떤 버튼을 눌러야 제이드가 복사한 것처럼 깨끗하게 나오냐고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은 저는 "그거 내가 손으로 일일이 덧그려서 만든 건데?"라고 동료 인턴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날 어이없게도 그 일을 계기로 저를 보는 상사와 사람들의 눈빛이 무한 신뢰의 눈빛으로 달라짐을 느꼈고, 몇 달 후 저는 정규직이 되었습니다. 따져보면 낡은 복사기를 탓하며 "내가 이러려고 어렵게 공부까지 했나" 한탄하는 대신, 저는 복사를 의뢰한 상사의 짜증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 싶었습니다. 덩치도 크고 늘 화도 많던 저의 첫 미국인 상사의 마음이, 그 밑에 깔린 제 디테일과 정성 앞에서 누그러진 거죠. 가장 비싼 복사기와 예민한 상사의 틈을 뚫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정규직이 너무 되고 싶었고, 그 간절함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넘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죠. 그 일은 복사 잔업,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요즘 AI 시대를 맞아 주변의 젊은 동료들이 더더욱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침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해외 공부까지 마치고 내가 이런 걸 하려고 일하나 불만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기계가 저보다 훨씬 잘할 것 같았던 그 복사라는 일에서조차 결국 이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그게 그때 제 마지막 간절함이었고, 세계적인 회사로 향하는 저의 커리어 첫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 이런 간절함이 많이 그립고, 또 그만큼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알맹이 없이 그럴듯한 문장만 가득한 메일과 기획서가 늘어나면서 핵심 정보를 골라내기가 더 어려워지고, 의사결정은 오히려 지연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문제 해결의 고민 자체를 AI에 통째로 넘기는 행위입니다. 이 과업을 왜 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디에 기여하는지 정의도 내리지 않은 채 복사와 붙여넣기만 반복하다 보면, 업무의 맥락을 깊이 이해하는 힘도 창의적인 대안을 떠올리는 힘도 서서히 무뎌집니다. 그리고 저의 실수처럼, "이거 저 사람이 직접 쓴 걸까, AI가 대충 만든 껍데기일까" 하는 얕은 의심이 쌓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신뢰가 조용히 깎여나가는 상황도 만나게 됩니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대신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바로 현장에 꼬여 있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복사기 일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늘 봐야 할 것을 놓치는 상사의 불편함을 해결해드린 것이었고, 제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상사의 꼬인 문제를 먼저 본 것이었습니다. AI는 주어진 질문에 답을 잘 만들어내지만, 애초에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려면 생각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래서 뭘 기여할 수 있는지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이른바 '생각을 생각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기술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문제는 대개 혼자 책상에 앉아 찾아지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대화하는 그 사이에서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읽어내고, 신뢰를 바탕으로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결국 문서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그 문서가 놓인 맥락을 읽어내는 서사 능력, 스토리텔링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맥락적 대화 기술' 등이 진짜 실력이 되는 시대라는 걸, 이 글을 쓰다 보니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리더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까
마침 몇 주 전 운 좋게도 우리나라 기라성 같은 리더들과 TV조선이 주최한 인재혁신포럼에 패널리스트로 참여했는데, 주제가 역시 AI와 인재 육성 혁신이어서 저의 생각을 함께 연결해봅니다.
포럼에서 이광형 전 카이스트 총장께서는 "제발 공부 좀 그만하고 또라이가 되라"고 말씀하셨던 졸업 연설 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평가 기준을 '양'에서 '경험의 가치'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고 화려한 보고서에 가산점을 주던 습관부터 버리고, AI가 절대 대신할 수 없는 '이 사람만의 시각과 통찰 이야기'가 담겼는지를 채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께서는 이제 '헤드카운트'가 아니라 '탤런트카운트'를 봐야 하는, 능력 밀도 중심의 조직관리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몇 명을 채용했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구성원이 지닌 능력과 역량이 얼마나 밀도 있게 채워져 있는가로 조직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크슬롭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머릿수가 아니라 진짜 채워진 인재 밀도로 조직을 보라는 이 말씀이 유독 시원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대표님은 AI 윤리, 즉 AI 사용의 경계를 조직의 언어로 성문화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고객 데이터를 AI에 입력해도 되는지, 채용·평가 판단에 AI 결과를 어디까지 반영할지 같은 구체적인 경계선을 미리 정해두고, 반복되는 교육으로 조직의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AI를 잘 쓰는 법을 넘어 AI가 만든 결과물의 환각과 논리적 비약을 잡아내는 검증 능력을 팀 단위로 훈련시켜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포럼에서 고려대 석좌교수이자 서울대 초빙교수로도 활동해온 조벽 교수는, 리더 스스로 먼저 'AI 오케스트레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AI가 뱉어낸 알맹이 없는 답변을 그대로 팀원에게 넘기지 말고, 맥락과 방향을 더해 현실로 가공하는 모습을 리더가 먼저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AI는 '완성품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완결을 돕는 '보조 도구'라는 인식이 비로소 조직 안에 자리 잡습니다.
최근 접한 인터뷰 경험도 이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롱블랙 기자님과의 인터뷰였는데,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촬영이 4시간으로 늘어나더니, 결국 3일에 걸쳐 총 8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기자님은 글을 쓰고 고치고, 또다시 쓰고 고치시더라고요. 그렇게 완성된 저의 롱블랙 글은 딱 한 페이지였습니다. '그 많던 이야기가 다 어디 갔지' 싶었지만, 읽어보니 핵심을 정확히 짚어 간결하고 너무나 잘 읽히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이 이렇게 잘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롱블랙의 그 집요함에 팬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결국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힘, 더 많은 공부와 고민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리박스컨설팅의 틀을 깨는 인사 컨설팅 시사점
re:Box가 조직진단에서 최근 부쩍 자주 마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회의 자료도, 보고서도, 심지어 피드백 문서까지 겉보기엔 나무랄 데 없는데, 정작 그 안에 이 조직만의 맥락과 고민의 흔적이 안 보이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고객들께 리박스에이전트를 개발해 회의 방식과 보고 패턴을 분석해 그 결과를 함께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그다음으로 교육을 통해, 이야기가 얼마나 매끄러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는가, 우리 이해관계자가 원하는 진짜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배우고 깨닫는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아무나 만드는 제도보다, 맥락을 읽어 진짜 꼬인 문제를 찾아내는 연결이 중요한 거죠. 이것이 진짜 완결과 성과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리더 스스로에게 던지는 실전 체크포인트
- 나는 보고서를 평가할 때 분량과 형식을 보는가, 그 안의 독창적 시각을 보는가?
우리 조직에는 AI가 써도 되는 영역과 사람이 반드시 검증해야 하는 영역의 경계가 명확한가?
나는 '업무 속도'가 아니라 '업무 완결 속도'로 성과를 재고 있는가?
한 줄 요약: 워크슬롭은 속도가 만든 병이 아니라, 고민을 생략한 대가로 찾아온 병입니다.
전략가 리처드 루멜트는 암벽등반에서 가장 어렵고 난이도가 센 구간을 '크럭스(crux)'라 부르는데, 진정한 전략가는 멋진 도표나 근사한 파워포인트 숫자 도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 내 고객과 가장 꼬인 문제의 그 구간을 정확히 정의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제 그냥 가볍게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짜 문제를 정의하는 것, 그 위에 맥락과 관계와 책임을 더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들의 몫이니, 오늘 회의 때 속으로 한 번 생각하고 스스로 질문해보셔요. "여기서는 꼬인 진짜문제가 뭐지?"라고 하면서 조금만 깊어지자구요. 이번 주도 화이팅하셔요.
정태희 드림
Jadechung@rebox.asia
SNS. jadechunghr
이 컬럼이 참고한 자료
Niederhoffer, K. et al., "AI-Generated 'Workslop' Is Destroying Productivity" (Harvard Business Review, 2025.9.22, BetterUp Labs·Stanford Social Media Lab 공동 연구, 미국 정규직 사무직 1,150명 대상)
Holweg, M. & Davenport, T., Harvard Business Review 워크슬롭 후속 기고 (2026.6, 조직의 지식 기반 부식 관련)
MIT Media Lab, 생성형 AI 투자 대비 성과 조사 (2025.7)
TV조선 인재혁신포럼 패널 세션 (이광형 전 카이스트 총장,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 조벽 고려대 석좌교수 발언 포함)
Richard Rumelt, 『The Crux』 — 전략과 '크럭스' 개념